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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의 이면 (조선어학회, 웃기시마호, 광복의 혼란)

by 여행정보정리 2026. 2. 5.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이 날을 '광복절'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날 경성의 거리는 예상과 달리 고요했습니다. 조선의 왕자 이우의 장례식이 연기되고, 일왕의 방송은 난해했으며,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광복은 환호가 아닌 혼란으로 시작되었고, 그 이면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비극과 투쟁의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히로시마 원폭에 희생된 조선의 왕자, 침몰한 귀환선 웃기시마호, 그리고 끝까지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조선어학회의 사투까지, 광복 전후의 진실을 입체적으로 살펴봅니다.

히로시마와 조선 왕자 이우의 비극

1945년 광복절 당시 환호보다 혼란이 컸던 조선 사회의 모습을 설명하는 대표 이미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이 폭발에 휘말린 사람 중에는 고종의 손자인 조선의 왕자 이우가 있었습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으로 복무하던 이우는 출근길에 핵폭발을 만나 전신에 화상을 입었고, 다음 날인 8월 7일 오전 5시 5분 34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이우의 장례식은 8월 15일 낮 12시 경성 운동장에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장례식이 연기되고 거리 곳곳에 벽보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정오 중대 방송, 1억 국민 필청"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족 장례식을 미루면서까지 해야 했던 중요한 방송, 그것은 바로 일본의 항복 선언이었습니다.

 

정오가 되자 라디오에서는 일왕의 목소리가 담긴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방송 내용이 일본 왕실에서나 사용할 법한 극도로 어려운 용어들로 가득했고, 녹음 상태마저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인들 대부분은 이 방송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경성교회의 한 학교에서 임시 교사로 일하던 일본인은 "15일 저녁, 나는 황금정 육종목 부근을 전차로 지나갔지만, 아무런 혼란도 없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번화가 중심인 을지로를 지나갔지만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도 없이 거리가 평온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증언에는 "8월 15일에 경성은 마치 귀주군 같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35년간 기다렸던 해방의 소식을 듣고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만세 함성도, 태극기 행렬도 없었던 8월 15일, 독립운동가 함석헌 선생은 이날을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표현했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은 방송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직 한반도에 일본 군과 경찰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해방이 왔지만, 그 기쁨을 제대로 누릴 수 없었던 것이 1945년 8월 15일의 진실이었습니다.

시간 사건 조선인들의 반응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이우 피폭 정보 부재
8월 15일 12시 일왕 항복 방송 내용 이해 못함, 고요함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 석방 만세 시위 시작

웃기시마호 침몰과 귀환의 비극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 일본 부근 해상에서 귀를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배 한 척이 폭발했습니다. 길이 108m의 거대한 일본 수송선 웃기시마호였습니다. 이 배에는 일본에 강제 동원되었던 조선인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광복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승선 정원 4000명을 훨씬 초과한 8000명에서 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은 이 사고의 원인을 미국이 뿌려놓은 수중 기뢰 때문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인양된 웃기시마호의 선체를 조사한 결과, 폭발 구멍이 선체 안쪽에서 바깥 방향으로 뚫려 있었습니다. 이는 폭발이 배 내부에서 발생했음을 의미합니다. 즉, 일본 해군이 의도적으로 조선인들이 탄 배를 침몰시켰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웃기시마호에 탑승했던 조선인들이 일본 내 비밀스러운 군사 시설 공사에 동원되었거나 비밀 문건 작업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일본은 이러한 비밀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고, 그 때문에 이런 비극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더욱 분노를 자아내는 것은 일본이 사고 9년 후인 1954년에야 웃기시마호를 인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희생자들의 유골 수습을 위해서가 아니라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에 고철을 팔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타국에 강제로 끌려가 수년간 노역에 시달리다가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갈 기쁨에 부풀어 있던 수천 명의 조선인들은 죽어서도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바다 속에 잠들어야 했습니다. 웃기시마호의 비극은 광복이 모든 조선인에게 똑같이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슬픈 역사를 보여줍니다. 오히려 광복을 눈앞에 두고 목숨을 잃어야 했던 이들의 억울함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어학회의 투쟁과 말모이의 기적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방송을 듣는 당시 일본 사회 모습

1930년대 후반, 조선의 한 중학교에서는 수업료를 내지 못한 학생들이 선생님 앞에 엎드려 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매를 맞다가 본능적으로 "엄마야"라고 외쳤습니다. 선생님은 그 학생을 더욱 심하게 때렸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조선말을 사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학교에서는 조선말이 금지되어 있었고, 우리말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받는 시대였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국어 독본'이라는 교과서 안에는 일본어가 가득했습니다. 조선의 국어는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시경은 우리말을 대신할 '한글'이라는 단어를 1913년에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세종대왕 때부터 사용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일제강점기에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1929년, 주시경의 제자들이 조선어연구회를 만들고 사전 편찬 작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엘리트 이극로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학 중 영국의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에서 모국어인 게일어 대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귀국하면 모국어를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이극로는 조선어연구회에 합류해 '물불'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조선어학회로 개명한 이들은 본격적인 사전 편찬에 나섰습니다. 전국 팔도의 사투리를 모으기 위해 학생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등학교 이상 학생들에게 각자 지역에서 쓰는 방언을 수집해 오라는 과제를 내준 것입니다. 이를 위해 조선어학회는 '시골말 캐는 잡지'라는 공책을 제작해 배포했습니다. 학생들의 도움으로 1931년부터 약 5년간 만 개 이상의 단어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전 만들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모은 단어 중 어떤 말을 표준어로 선정할지를 두고 회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개가 낳은 자식을 '강아지'로 할지 '개새끼'로 할지를 놓고 장시간 토론했고, 한 회원이 "나는 개새끼야"라고 말해 엄숙했던 회의장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진지한 과정을 거쳐 1년 9개월 만에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완성했습니다.

 

1936년 10월 28일, 조선어학회는 표준말 모음 발표 행사를 개최했고,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축사를 맡았습니다. 안창호는 "조선민족은 조상으로부터 계승해온 모든 것을 잃고 결국은 국가까지 잃어버렸다. 다만 조선어만은 보유한 상태이므로 이것의 보급과 발달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행사는 일제 경찰에 의해 강제로 중단되었고, 이후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1942년 9월, 함경남도에서 시작된 단순한 검문이 조선어학회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한복 차림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청년 박병엽이 일제 형사에게 붙잡혔고, 그의 조카인 중학생 박영인의 일기장에서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한테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는 문장이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서 국어는 일본어를 의미했고, 일제는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국어로 생각하도록 가르친 교사를 찾아내기로 했습니다. 그 교사가 바로 조선어학회 회원인 정태진이었습니다.

연도 주요 사건 의미
1913년 주시경, '한글' 명칭 창안 우리말 정체성 확립
1929년 조선어연구회 재결성 사전 편찬 본격화
1936년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완성 표준어 체계 확립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회원 33명 검거

정태진은 증인으로 출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갔지만, 실제로는 피의자 신분으로 20여 일간 고문을 받았습니다. 결국 조선어학회가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 단체라고 자백했고,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일제히 검거되었습니다. 사전 관련 자료와 일기장, 수첩까지 모조리 압수당했고, 회원과 후원자 총 33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잔혹한 고문을 당했고, 이윤재와 한징 두 사람이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일제는 재판을 열지 않고 고문을 지속했으며, 9번의 공판 끝에 이극로를 포함한 다섯 사람에게 6년 징역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들은 상소했지만 1945년 8월 13일 다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틀 후인 8월 15일, 광복이 찾아왔고 8월 17일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습니다.

 

석방된 회원들이 조선어학회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사전 원고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13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광복 24일 후인 9월 8일, 경성역 역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경성역 창고에 조선말을 풀이한 원고 뭉치가 한 무더기 있어요." 재심을 위해 함흥에서 경성으로 이송되었던 400자 원고지 26,500여 장 분량의 사전 원고가 경성역 창고에 버려진 채 발견된 것입니다.

 

원고를 되찾은 조선어학회는 다시 붓을 들었고, 1929년 시작된 사전 편찬은 약 18년 만인 1947년 '조선말 큰 사전' 제1권을 출간하면서 첫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꾼 조선어학회는 1957년 전체 6권에 이르는 큰 사전을 완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국어사전의 시작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은 환호의 순간이 아니라 혼란과 공백, 그리고 미처 끝나지 않은 폭력의 시간이었습니다. 히로시마에서 희생된 조선의 왕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바다에 수장된 수천 명의 조선인, 그리고 옥중에서도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이야기는 광복이 단순한 기쁨만이 아니었음을 증명합니다. 사용자가 지적한 대로, 이 글은 '해방은 왔으나 삶은 곧바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또렷이 보여주며, 언어와 기록을 지키려 한 사람들의 투쟁이 광복 이후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의 입체성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지금 자유롭게 한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이름 없는 수많은 영웅들의 희생 덕분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1945년 8월 15일 조선인들이 광복 사실을 바로 알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일왕의 항복 방송이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극도로 어려운 용어로 구성되어 있었고, 녹음 상태도 좋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 한반도에는 여전히 일본 군과 경찰이 주둔하고 있어 조선인들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도 함부로 기뻐할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Q. 웃기시마호 침몰 사건이 의도적이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A. 일본은 수중 기뢰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인양된 선체의 폭발 구멍이 선체 안쪽에서 바깥 방향으로 뚫려 있었습니다. 이는 폭발이 배 내부에서 발생했음을 의미하며, 일본 해군이 의도적으로 폭파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Q. 조선어학회 사전 원고가 광복 후 발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재판에 불복해 재심을 신청하면서 증거물인 원고가 함흥에서 경성고등법원으로 이송되었고, 그 과정에서 경성역 창고에 보관되었습니다. 광복 후 혼란 속에서 버려진 채 있던 원고를 경성역 역장이 발견해 조선어학회에 연락한 덕분에 기적적으로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DGi54rLnjW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