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한 아버지가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펼친 치밀한 전략과 그로 인한 비극적 권력 투쟁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남깁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왕이 될 수 없었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조선 제26대 왕 고종으로 등극시켰지만, 이후 35년간 부자는 권력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충돌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어떻게 고종을 왕으로 만들었으며, 부자 간 권력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었고, 외세 개입 속에서 조선 말기 정치가 어떤 한계를 드러냈는지 살펴봅니다.
고종과의 갈등: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권력 투쟁

흥선대원군은 1820년 사도세자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직계 왕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에게 인정받을 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그는 종친부에서 실무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1849년 헌종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흥선대원군은 왕위 후보에 올랐지만, 안동 김씨 세력은 나이 어린 강화도령 철종을 선택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너무 유능하고 똑똑해서 자신들이 조종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방탕한 모습을 연출하며 세도가문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습니다. 기생집을 드나들고 양반들에게 조롱당하는 모습을 보이며 권력욕이 없는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이는 혹시라도 세도가의 표적이 될까 두려워한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를 찾아가 자신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양자로 들이자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11살이었던 이명복은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나이였고, 흥선대원군 역시 어린 아들 뒤에서 권력을 행사하기 용이했습니다.
철종이 사망한 바로 그날, 이명복은 고종으로 즉위했고 흥선대원군은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권력의 중심에 섰습니다. 대원군은 왕의 직계 혈통이 아닌 사람이 왕이 되었을 때 그 아버지에게 붙여주는 호칭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고종 뒤에서 조선의 국정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비변사를 폐지하여 안동 김씨의 힘을 빼고,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권 강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민심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성장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1873년 고종은 건청궁이라는 독립 공간을 만들며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고, 최익현이 상소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자 고종은 이를 적극 옹호했습니다. 결국 고종은 친정을 선언하며 아버지에게 권고사직을 요구했고, 흥선대원군과 고종을 잇던 전문을 폐쇄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고향 양주로 내려갔지만 권력 복귀를 포기하지 않았고,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잠시 조정에 복귀했으나 33일 만에 청나라에 납치되었습니다. 고종이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청나라는 흥선대원군을 인질로 삼아 고종을 압박하려 했던 것입니다.
외세 개입: 청나라, 일본, 러시아의 각축장이 된 조선
흥선대원군 시기부터 조선은 외세의 압력에 시달렸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등 서양 세력의 침입이 이어지자,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펼쳤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척화비를 세우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선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 조선은 개화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일본과 수교했고,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근대화를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으로 쌀이 대량 유출되면서 물가가 폭등했고, 구식 군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자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했습니다. 청나라는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을 납치했고,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강화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다시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이를 빌미로 일본도 군대를 파견하며 청일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경복궁을 점령하고 흥선대원군을 다시 끌어들여 민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고종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고, 이후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러시아는 조선을 완충지대로 삼고자 했고, 일본은 조선을 발판으로 만주 진출을 노렸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조선은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1898년 병으로 사망했는데, 고종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도,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았습니다. 35년간 이어진 부자 간 권력 투쟁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끝났습니다.
조선 말기 정치: 권력 투쟁과 개혁의 딜레마

조선 말기 정치는 세도정치의 폐해, 외세의 침략, 근대화의 필요성이라는 복합적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비변사 폐지, 서원 정리, 경복궁 중건 등을 통해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을 추구했지만, 경복궁 공사 과정에서 당백전을 발행하여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야기했습니다. "땡전 한 푼도 없다"는 표현이 바로 이때 나온 말입니다. 또한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선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켰습니다.
고종의 개화 정책은 근대화를 위한 시도였지만 여러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별기군 창설과 통리기무아문 설치는 근대적 군대와 행정 체계를 만들려는 노력이었으나, 구식 군인들과의 갈등을 초래하여 임오군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으로 쌀이 대량 유출되면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고, 개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 커졌습니다.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 후 중립국화를 추진하며 국제적십자에 가입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압력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권력 투쟁은 조선 말기 정치의 비극을 상징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일본과 손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고종은 아버지를 정치적 경쟁자로 인식하며 끝까지 화해하지 않았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복귀했을 때, 고종은 청나라의 개입을 방조했고, 1894년 갑오개혁 때는 일본의 힘을 빌려 아버지를 다시 끌어들였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았고, 고종과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습니다.
조선 말기 정치는 개혁과 보수, 자주와 외세 의존 사이에서 일관된 방향을 찾지 못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왕권 강화에 초점을 맞췄고, 고종의 개화 정책은 외세 의존적이었습니다. 민영환 등 개화파 관료들은 러시아와의 외교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 했지만, 러시아 역시 일본과 모스크바 의정서를 맺으며 조선을 남북으로 나누려 했습니다. 결국 조선은 외교적 자주권과 군사력 없이는 중립국이 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왕조 518년의 역사는 막을 내렸고, 승정원일기는 "대일본 황제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도 민생을 보전하노니"라는 비통한 기록을 마지막으로 끝났습니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이야기는 권력을 둘러싼 부자 간 갈등이 국가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개인의 야망과 정치적 판단이 시대적 제약 속에서 어떻게 비극으로 귀결되는지, 외세의 개입이 내부 권력 투쟁을 어떻게 악화시키는지를 생생히 드러냅니다. 조선 말기는 개혁의 필요성과 실행 능력의 괴리, 외교적 고립과 군사적 무력함이 결합되어 국권 상실로 이어진 역사였습니다. 이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일관된 국가 전략의 중요성, 내부 단결의 필요성, 그리고 국제 정세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 흥선대원군 편: https://www.youtube.com/watch?v=30eUJPOhH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