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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토사구팽 (이거이, 이숙번, 조영무)

by 여행정보정리 2026. 2. 13.

조선 초기, 왕권을 잡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끝난 뒤 공신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요? '토사구팽'이라는 사자성어는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권력자가 목적을 달성한 후 공신들을 제거하는 냉혹한 정치 현실을 상징합니다. 태종 이방원은 1차, 2차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올랐지만, 그 과정에서 함께했던 공신들을 하나둘 제거해 나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태종 시대 대표적인 공신 네 명—이거이, 이숙번, 조영무, 하륜—의 상반된 운명을 통해 조선 초기 권력 정치의 민낯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거이의 몰락: 선을 넘은 권세와 역모 의혹

태종 이방원의 왕권 강화 정책을 다룬 역사 콘텐츠 대표 이미지

이거이는 태종 정권의 핵심 공신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큰아들 이저는 1차, 2차 왕자의 난에서 1등 공신에 오른 인물이었고, 이저는 태종의 누나인 경신공주와 결혼했으며, 둘째 아들 이강은 태종의 첫째 딸 정순공주와 결혼했습니다. 이처럼 왕실과 두 번이나 혼인 관계를 맺은 이거이 가문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거이와 그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과시하며 끊임없이 선을 넘는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1차 왕자의 난이 끝난 후 이거이는 이방간의 기생을 취했고, 아들 이저는 이방석의 기생을 취했는데, 문제는 이거이가 취한 기생이 일전에 아들 이저가 취했던 여자였다는 점입니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이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패륜 행위였습니다. 또한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 추진하던 사병 해체에 반발하다가 부자가 함께 좌천되었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지나치게 거창한 행차를 해서 탄핵을 받았습니다.

 

태종은 원래 공신들의 부정부패에 관대한 편이었기에 이런 일들은 눈감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거이는 결국 태종이 가장 싫어하는 일까지 저질렀습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지 1년쯤 지났을 때, 이거이는 이숙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이야 주상을 왕위에 올린 우리의 권세가 막강하다. 훗날 주상의 아들이 왕이 되면 우리의 권세도 다 빼앗길 것 같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서 이들을 제거한 뒤 다시 상왕을 왕으로 세우는 게 어떤가?" 이는 명백한 역모 발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영무는 곧장 이 사실을 태종에게 전했고, 태종은 3년 동안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측근들을 불러 이 일을 공론화했습니다. "이거이와 이숙번이 모두 나이가 많아서 둘 중 하나가 죽는 날엔 영원히 진실이 묻히게 되지 않겠는가?" 관료들이 모여 이숙번과 조영무를 대질시켰고, 조영무는 "저는 그저 들은 대로 전했을 뿐입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이거이는 부인했지만 사실이 확인되자 대신들은 연이어 이거이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결국 태종은 "이거이는 공신이니 죽일 수 없다. 이거이와 그의 네 아들을 모두 폐서인하고 지방에 나가 살도록 하라"고 명했고, 이거이는 지방에서 조용히 살다 늙어 죽었습니다.

인물 주요 행적 결말
이거이 왕실 2중 혼인, 역모 발언, 권세 남용 폐서인, 지방 유배
이숙번 1등 공신, 성문 막음, 권세 과시 유배, 죽을 때까지 방면 안 됨
조영무 청렴 처신, 충성, 고발 정승까지 승진, 존경받으며 사망
하륜 탐욕, 뇌물, 정책 주도 태종의 비호 속 권세 유지

이숙번의 오만: 권세를 잃고 유배된 1등 공신

이거이 이숙번 조영무 하륜의 상반된 운명을 비교한 표

이숙번은 조선 건국 후 제1회 과거 시험에서 급제한 엘리트였습니다. 하륜의 소개로 이방원을 만나게 된 이숙번은 1차 왕자의 난 때 안상수 이숙번이 정도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고, 하륜이 "제가 그에게 이미 말해뒀으니 그가 군대를 이끌고 상경할 때 그 군사들을 활용하시면 됩니다"라고 했을 때 "맡겨 주십시오. 그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라며 확신에 찬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뒤 이숙번은 군사 부문을 맡으며 조사의 난 진압에서 공을 세우는 등 조정의 실세로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갑자기 큰 힘을 얻으니 주체를 못했는지 이숙번은 눈치 없이 마구 권세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숙번의 집은 서대문 안쪽에 있었는데, 한양으로 들어오는 큰 성문이라 여러 사람들이 오가며 소리가 많이 났습니다. 그러자 이숙번은 "아, 시끄러워서 도저히 못 살겠다네. 성문을 틀어막아 버리든지 해야지"라고 말하고는 진짜로 성문을 막아버렸습니다. 백성들이 통행에 불편하다며 난리를 치자 조정에서는 새로 성문을 하나 뚫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새로 문을 뚫기로 한 위치가 하필이면 또 이숙번의 집 앞으로 결정됐습니다.

 

이숙번은 "실수다. 내가 하도 시끄러워서 성문을 틀어막아 버렸는데 다시 내 집 앞에 성문을 내면 어쩌자는 겁니까? 인덕궁 앞에 좋은 장소가 있으니 거기다 성문을 내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제안했습니다. 관료들이 "인덕궁은 상께서 계신 곳인데 어떻게 거기다 성문을 뚫습니까?"라고 반문하자, 이숙번은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쨌든 내 집 앞에는 안 됩니다"라고 우겼고, 결국 인덕궁 앞에 새 문을 뚫게 됐습니다. 이것만 봐도 이숙번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한번은 이숙번과 하륜이 대간들에게 탄핵당하자 둘은 짜증이 났는지 임금에게 올릴 상소를 작성했습니다. "대간이 함부로 대신의 잘못을 말하지 못하게 하소서." 대간은 조선시대에 사헌부, 사간원에 소속된 관료들로 이들이 하는 일은 임금이나 대신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탄핵하는 일종의 언론 기관 같은 직책입니다. 왕의 잘못도 지적하는 대간들이 대신의 잘못은 지적하지 못하게 하라는 건 말도 안 됐죠. 당시 정승이던 성석린은 유학자로서 이런 상소를 올릴 순 없다며 상소문에 서명하기를 거절했는데, 그러자 이숙번은 그날 밤 직접 성석린의 집을 찾아가 "좋은 말로 할 때 서명하시오"라며 강제로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당시 이숙번의 관직은 참찬, 정승을 보조하는 자리였는데 자기보다 높은 사람한테 강제로 서명을 받아내다니 이숙번의 위세가 참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영원히 권세를 부릴 줄 알았던 이숙번은 슬슬 태종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우의정 자리가 비어서 태종은 새로 우의정에 오를 사람을 뽑아야 했는데, 자기가 될 줄 알았던 이숙번은 승진 경쟁에서 떨어지자 잔뜩 화가 나서 병에 걸렸다며 몇 달 동안 궁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태종은 가뭄 때문에 고민이 한창 많은 데다 세자의 비행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안 그래도 날카로운 상황이었는데, 이숙번이 극간 일로 삐져서 일은커녕 궁궐에 나오지도 않자 태종도 결국 폭발했습니다. "이만큼 봐줬으면 됐다. 이숙번을 당장 유배 보내도록 하라." 지금까지 참아왔던 태종은 이번엔 곧장 이숙번을 유배 보내 버리더니 그 뒤로 죽을 때까지 찾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태종은 죽기 전에 세종에게 "내가 죽은 뒤에도 절대로 이숙번을 풀어줘서는 안 된다"라며 당부했습니다. 그렇게 유배지에서 여생을 보내던 이숙번이 잠깐 세종의 부름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실록에 적힌 2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록이 부실해서 수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숙번은 잠시 한양에 들러 그때의 일을 전해주는 것 외엔 두 번 다시 한양에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조영무와 하륜: 대조적인 두 공신의 생존 전략

조영무는 원래 이성계의 일개 사병 중 한 명이었습니다. 뛰어난 무예를 눈여겨보던 이성계는 그를 발탁해 심복으로 삼고 중요한 일들을 맡기며 능력을 키워줬습니다. 1392년 이방원은 조영무에게 정몽주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겼고, 그는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후 조영무는 정도전의 사병 혁파에 반발하면서 그의 반대파인 이방원 측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1차 왕자의 난 때 조영무는 이방원을 도와 1등 공신에 올랐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이런 조영무를 보며 태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알다시피 조영무는 원래 일개 병사에 불과했는데 내가 녀석을 발탁해 벼슬도 주고 지금까지 키워준 거다. 그런데 이 몹쓸 녀석은 지난 난리 때 나를 배신하고 너에게 붙었으니 이리도 배은망덕한 자가 또 있겠느냐. 이렇게 간사한 놈이 너라고 배신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 너도 조심하거라." 하지만 태조의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던 조영무는 새 세상에 맞춰 자신을 바꿨습니다.

조선 초기 중앙집권 강화를 보여주는 군사 개혁 이미지

 

이때까지만 해도 한 성깔 하던 조영무가 확 달라진 계기가 있었습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사병 혁파를 추진하면서 조영무에게도 사람을 보내 무기를 회수하게 했는데, 조영무는 이에 반발하여 "주상이 내게 그런 명을 내릴 리가 없다"라면서 관료를 폭행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냥 넘어갈 줄 알았던 조영무의 예상과 달리 태종은 곧장 조영무를 유배 보내 버렸습니다. 이때 조영무는 1, 2차 왕자의 난 때는 사병이 필요했지만 이제 태종이 왕위에 오른 이상 사병은 필요 없으며, 앞으로의 정치 생활에 필요한 건 충성심과 처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조영무는 죽을 때까지 뇌물 시비가 한 번도 없을 정도로 깨끗했고, 하륜이 여기저기 일을 크게 벌이려 할 때 말리기도 했습니다. 하륜은 "사람이 너무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위협으로 굴복시킬 수도 없는 이는 오직 그대뿐이요"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영무는 태종이 선위 파동을 일으킬 때마다 앞장서서 말렸고, 이거이를 불충 고발하는 등 태종이 좋아할 만한 일만 골라서 했습니다. 그렇다고 태종이 하는 말은 다 옳다고 하는 예스맨은 또 아니었던 게, 어느 날 태종이 정도전을 욕하자 조영무는 당당하게 "정도전도 잘못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한 일 아니겠습니까"라며 반박할 정도로 바른말 할 땐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태종은 그런 조영무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정승까지 시켜준 데다가, 조영무가 죽자 매우 슬퍼하며 "대신이 죽었을 땐 관례상 3일간 조회를 쉬어야 하는데 이번엔 5일 동안 쉬는 게 어떻겠어"라고 말했습니다. 실록에서 조영무는 "소박하고 진실하고 바른말 잘하며 공정했다"라고 평했으니, 태종의 신하들 중 가장 올바르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면 하륜은 조영무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영무는 일개 병사 출신으로 아는 게 없었지만, 하륜은 이인임과 친척인 명문가 출신으로 이색 학당에서 공부한 유학자 출신이라 아는 것도 많았습니다. 또한 매사에 신중하고 고지식한 조영무와 달리 하륜은 일 처리가 빠르고 거침없어 일을 크게 벌리는 스타일이었습니다. 태종은 이런 하륜을 적극 활용해 여러 정책들을 시행하면서 조선의 기틀을 잡았습니다. 마치 태조가 정도전을 이용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륜이 조영무와 반대인 점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살면서 뇌물 시비 한번 걸린 적 없던 조영무와 달리 하륜은 재산을 늘리는 데 엄청난 욕심을 보였습니다. 무단으로 백성을 동원해 간척을 하고는 그 땅을 혼자 다 차지하고, 정릉 근처 땅을 내놓으라고 태종에게 건의한 후 노른자 땅은 자기가 먼저 다 차지했습니다. 뇌물을 먹고 자격 미달인 자를 벼슬에 추천하고, 로비를 받고 벼슬을 팔아먹기도 했으니 욕심이 끝도 없었죠. 그러나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하륜은 대간들의 탄핵을 받았지만, 태종은 "하륜은 이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일세. 그를 통해 이 나라의 기틀이 잡혔으며 앞으로 할 일도 많은 인재인 데다 충성심 또한 높으니 이런 명신이 어디 있겠는가"라며 그를 비호했습니다.

 

하륜의 만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조영무는 항상 태종의 뜻이 뭔지 살피고 신중하게 그 의도에 맞춰 옳은 말만 했지만, 하륜은 태종의 뜻에 어긋나는 발언도 많이 했습니다. 조선의 건국 과정을 부정적으로 보는 글을 짓기도 하고, 민무구 민무질 사건이나 선위 파동 등 사건이 터질 때마다 말실수를 해서 태종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옳은 말이 아닐지 신중치 못해 죄송합니다, 전하. 앞으론 조심하겠습니다"라고 하면 그냥 넘어갔습니다. 태종이 이숙번이나 이거이 부자, 민씨 가문을 대할 때에 비해 하륜에게만 너무 관대한 걸 보면 역시 하륜은 아끼긴 엄청 아꼈나 봅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태종이 하륜에게 이렇게 관대했던 이유를 나이 때문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이숙번, 이거이 부자, 민씨 동생들 같은 자들은 나이가 어려서 다음 왕 때도 살면서 권세를 부릴 수 있으니 그때 제어하지 못할까 봐 미리 싹을 잘라둔 반면, 하륜은 태종보다 나이가 스무 살이나 많으니 그럴 일 없다고 생각해 관용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태종의 인사 기준은 도덕성이 아니라 '통치에 유용한가', '후대 권력에 위협이 되는가'였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태종의 공신 숙청은 단순한 배신과 보복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조선 초기의 불안정한 권력 구조 속에서 태종은 끊임없이 잠재적 위협을 계산했고, 그 계산법이 각 인물의 운명을 갈랐습니다. 이거이는 역모 발언으로, 이숙번은 오만으로 몰락했지만, 조영무는 청렴한 처신으로 존경받으며 생을 마쳤고, 하륜은 탐욕에도 불구하고 능력과 나이로 보호받았습니다. 이는 권력 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군주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를 냉혹한 정치술로 평가해야 할지, 국가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이해해야 할지 여전히 고민이 남지만, 분명한 것은 권력의 세계에서 처신과 충성, 그리고 시대를 읽는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권력자가 목적 달성 후 공신을 제거하는 정치 비유 이미지

자주 묻는 질문 (FAQ)

Q. 태종은 왜 공신들을 제거했나요?

A. 태종은 왕권 강화와 국가 안정을 위해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공신들을 제거했습니다. 특히 나이가 어려 다음 왕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들,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 그리고 역모 발언이나 권세 남용으로 왕권에 도전하는 인물들을 우선적으로 숙청했습니다. 이는 조선 초기 불안정한 권력 구조를 안정화시키려는 현실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Q. 조영무는 어떻게 태종의 신임을 끝까지 유지했나요?

A. 조영무는 사병 혁파 사건으로 유배를 당한 후 정치 생활에 필요한 것이 충성심과 처신임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는 뇌물을 받지 않고 청렴하게 살았으며, 태종이 좋아할 만한 일(선위 파동 저지, 이거이 고발 등)을 적극적으로 수행했습니다. 동시에 예스맨이 아니라 바른말을 할 때는 당당히 했기 때문에 태종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결국 정승까지 올라 존경받으며 생을 마쳤습니다.

 

Q. 하륜은 탐욕이 심했는데도 왜 처벌받지 않았나요?

A. 태종은 하륜을 적극 활용해 조선의 기틀을 잡았기 때문에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또한 하륜은 태종보다 스무 살이나 많아서 다음 왕 때까지 살면서 권세를 부릴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태종은 도덕성보다는 통치에의 유용성과 왕권에 대한 위협 여부를 우선적으로 고려했으며, 이러한 현실적 계산이 하륜에 대한 관용으로 이어졌다고 해석됩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63_NoQds7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