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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조선족의 정체성 (한국어 간판, 양꼬치 문화, 세대별 언어 변화)

by 여행정보정리 2026. 1. 28.

중국 동북부 지린성에 위치한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한국과 북한을 제외하고 공용어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지역입니다. 19세기 말 가뭄과 일본 식민지화를 피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후손인 조선족은 현재 약 70만 명이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연길과 용정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 독특한 문화 공간은 한국, 북한, 중국의 문화가 교차하는 특이한 정체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세대가 지나며 점차 희석되어 가는 언어와 전통의 현실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 시내에 한국어 간판이 밀집해 있는 상업 거리 전경

한국어 간판 속 문화적 혼종성의 실체

연변 지역, 특히 연길시의 거리를 걷다 보면 흥업은행, 엔젤리스 커피, 롯데리아 같은 한글 간판이 곳곳에 눈에 띕니다. 공항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풍경은 마치 북한의 발전된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YBTV라는 연변 TV에서는 한국어 자막과 함께 표준어에 가까운 조선어 방송이 나오며, 백화점 안에는 CGV와 스타벅스 커피가 한국어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특히 연변 대학교 맞은편에 위치한 대학성이라는 상가 단지는 70개가 넘는 매장 대부분이 한국어 간판을 달고 있어, 중국 내 다른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어 간판의 범람은 조선족 사회의 언어 유지력을 직접적으로 반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문화를 소비하고자 하는 중국 MZ세대를 겨냥한 상업적 전략의 결과물입니다. 실제로 연길 시내의 조선족 비율은 50%에 불과하며, 20~30년 전 90%였던 것과 비교하면 급격히 감소한 수치입니다. 한족들이 경제 활동을 위해 유입되면서 조선족의 비율은 계속 줄어들고 있고, 더 작은 도시인 용정시로 가야 70% 정도의 조선족 비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24년 사드 배치 이후 롯데와 엔젤리너스가 철수했지만 간판만 남아 있는 것처럼, 한국어 표기는 실제 언어 사용자의 존재보다는 문화적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메일롱이라는 편의점 체인의 존재입니다. 일본 미니스톱과 유사한 외관을 가진 이 중국 기업은 연변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한국 과자와 음료수를 대량으로 진열합니다. 바나나맛우유가 4,000원, 카스 맥주가 1,500원에 판매되는 것을 보면 한국보다 저렴한 가격에 한국 상품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 문화가 '언어'보다 '상품'으로 먼저 소비되는 현실을 보여주며, 조선족의 정체성이 문화적 실천보다는 경제적 거래의 대상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한류 장소라고 명명된 메일롱 매장은 한국 문화에 대한 동경과 상업적 활용이 교차하는 공간이며, 이는 조선족 사회가 겪고 있는 정체성의 복잡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양꼬치 문화로 본 생활 방식의 중국화

연변 지역에서 만난 가장 인상적인 음식 경험은 양꼬치였습니다. 한국에서 먹어본 양꼬치와는 확연히 다른 풍미와 크기, 그리고 조리 방식은 이 지역이 단순히 한국어를 쓰는 공간이 아니라 중국 문화권에 깊이 뿌리내린 곳임을 보여줍니다. 연길 시내의 양꼬치 가게에서 원조 양고기와 옛날식 양고기를 주문했을 때, 하나에 700~800원이라는 가격은 한국보다 저렴했지만 고기의 질과 양은 훨씬 우수했습니다. 순한 맛, 약간 매운 맛, 매운 맛, 엄청 매운 맛으로 구분된 소스를 제공하는 방식도 중국 음식 문화의 전형을 따릅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연변 맥주인 시빙천 맥주와 함께 즐기는 양꼬치의 조합입니다. 도수 9도로 한국 맥주보다 높은 알코올 함량을 가진 이 지역 맥주는 연변만의 독특한 음주 문화를 보여줍니다. 양꼬치 가게 내부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고, 반찬으로 제공되는 채소와 소스의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길거리 음식을 파는 수준을 넘어 중국 동북 지역의 정착된 외식 문화를 반영합니다. 한국에서 먹었던 양꼬치들이 작고 풍미가 약했던 것과 달리, 연변의 양꼬치는 고기가 크고 깊은 맛을 냈으며, 이는 중국 내에서도 양고기 요리 전통이 강한 지역임을 증명합니다.


연변의 식문화는 양꼬치 외에도 다양한 중국식 요리와 조선족 전통 음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연변 대학 앞 야시장에서는 떡볶이, 순대, 삼겹살 꼬치 같은 한국식 길거리 음식과 함께 탕후루, 생선 꼬치, 오뎅 같은 중국식 간식이 공존합니다. 특히 순대는 연변의 명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먹어보면 한국의 순대보다 뻑뻑하고 고기가 더 많이 들어가 있어 식감이 다릅니다. 가격은 3,000원 정도로 저렴하지만, 소금을 따로 제공하지 않아 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들은 조선족의 음식 문화가 한국과 중국 사이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세대가 지나며 점차 중국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세대별 언어 변화와 정체성의 희석

연변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세대 간 언어 사용의 격차입니다. 노년층은 여전히 조선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만, 젊은 세대로 갈수록 조선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연길 시내의 양꼬치 가게나 편의점에서 일하는 젊은 직원들은 대부분 중국어만 사용했고, 조선어로 말을 걸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공식 설립한 이후 진행된 정체성 교육의 결과입니다. 학교, 군대, 선전 활동을 통해 "우리는 중국 국민인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을 주입받은 후손들은 한반도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서서히 잃어갔고, 이는 언어 사용의 감소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사례는 용정시에서 만난 김씨 아저씨입니다. 김씨 아저씨 국밥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는 그는 분명 조선족 성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을 한족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는 여러 세대를 거치며 한족과의 결혼이 이루어지고, 주변 친척과 친구들이 대부분 한족이 되면서 스스로를 한족으로 정체화하게 된 결과로 보입니다. 조선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조선족 후손들도 많으며, 이들은 김, 이, 박 같은 성씨를 유지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문화적 연결고리는 거의 상실한 상태입니다. 연변 대학교에서 조선어 학과가 운영되고 있지만, 이는 학문적 연구나 통역·번역가 양성을 위한 것이지 일상 언어로서의 조선어 유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용정시 같은 작은 도시로 갈수록 조선족 비율은 높아지지만, 경제적 기회가 적어 젊은이들이 빠져나가면서 도시 전체가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상점들은 문을 닫고, 거리는 한산하며, 아파트 가격도 30평대 기준 6천만~8천만 원 수준으로 저렴합니다. 식당에서 일하면 월 60만 원 정도를 받는 이 지역의 소득 수준을 고려하면 결코 싼 가격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은 한국이나 중국의 대도시로 떠나 최소 세 배 이상의 수입을 올리려 합니다. 이러한 인구 유출은 언어 공동체의 약화로 이어지며, 결과적으로 조선어 사용 환경을 더욱 축소시킵니다. 거리에서 들리는 조선어의 억양도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강하지 않고, 오히려 표준어에 가까운 부드러운 톤으로 변화하고 있어 언어 자체도 변형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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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한국어 간판과 양꼬치, 세대별 언어 변화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정체성의 복잡한 층위를 드러냅니다. 한국어는 상업적 기호로 남아 있지만 실제 사용자는 줄어들고 있으며, 음식 문화는 중국화되고 있고, 젊은 세대는 조선어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문화가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라, 언어와 뿌리가 개인의 선택과 환경에 따라 재정의되는 과정입니다. 연변은 관광지가 아니라 정체성이 교차하고 희석되는 생활 공간이며, 이곳에서 우리는 "언어와 문화는 어디까지 개인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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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oBGuloMJW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