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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시대의 격동 (반원정책, 홍건적침입, 노국대장공주)

by 여행정보정리 2026. 2. 14.

고려 말 공민왕 시대는 외세의 침략과 내정 개혁이 격렬하게 충돌했던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반원정책, 연이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그리고 사랑하는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까지, 공민왕은 개혁 군주로서의 꿈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는 단순한 왕조 교체기가 아니라, 동북아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관련 역사 이미지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개혁 의지

공민왕은 고려 왕의 셋째 아들인 강릉대군으로 태어나 12살의 어린 나이에 원나라에 볼모로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10년간의 원나라 생활은 그에게 굴욕만을 안겨준 것이 아니라, 원나라의 쇠퇴를 직접 목격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원나라 황실은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혼란에 빠졌고, 이런 상황 속에서 원나라 황제는 당시 고려 왕이었던 충정왕을 끌어내리고 강릉대군을 왕으로 앉혔습니다. 원나라는 10년이나 자국에서 생활한 강릉대군이라면 자신들에게 우호적일 것이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351년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원나라 황제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습니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점진적으로 반원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 행동이 바로 기철 일당의 숙청이었습니다. 기철은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의 오빠로, 든든한 배경을 믿고 고려에서 백성을 수탈하고 관직을 사고팔며 온갖 비리를 저지르던 인물이었습니다. 신하들은 기황후의 보복을 우려하며 반대했지만, 공민왕은 "지금 원나라는 각지의 반란 진압에 군사력을 투입하느라 고려를 칠 여력이 없다"며 단호하게 기철 일당을 제거했습니다.

 

기철 숙청에 이어 공민왕이 추진한 것이 바로 쌍성총관부 수복이었습니다. 쌍성총관부는 원나라가 고려의 동북면 지역을 빼앗아 설치한 기구로, 원 간섭기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1356년, 공민왕은 이 지역 출신인 이자춘과 이성계 부자의 협력을 얻어 쌍성총관부를 공격했습니다. 이자춘은 본래 고려 사람으로 원나라 관리로 있었으나 항상 고려로 돌아가길 희망했다며 귀화를 청했고, 공민왕은 이들에게 내부에서 호응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자춘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동북면을 되찾는 데 성공한 공민왕은 이들을 동북면의 일인자로 삼았고, 이것이 훗날 조선 건국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시기 주요 정책 의미
1351년 공민왕 즉위 원 간섭기 속 개혁 군주 등장
1356년 기철 일당 숙청 친원 세력 제거, 반원정책 시작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동북면 영토 회복, 이성계 부자 귀화

다만 학계에서는 쌍성총관부 수복을 단순한 "내통"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당시 원 세력 내부의 균열과 고려의 군사적 압박이 맞물린 결과로 평가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또한 공민왕의 반원정책은 즉위 직후부터 전면 대립으로 전환된 것이 아니라, 원나라의 약화를 지켜보며 점진적으로 추진된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홍건적침입과 끊임없는 외세의 위협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추진하며 고려를 개혁하려던 시기, 고려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남쪽에서는 왜구가 수십 차례에 걸쳐 침입했고, 북쪽에서는 홍건적, 원나라 황실 군대, 원나라 군벌, 여진군까지 쉴 새 없이 쳐들어왔습니다. 왜구의 침입 규모를 모두 합하면 훗날 임진왜란과 비견될 만큼 컸다고 전해지는데, 최영과 이성계는 단 한 번도 지지 않고 왜구를 소탕하며 고려의 영웅으로, 왜구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홍건적의 침입은 고려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홍건적은 붉은 두건을 쓰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원래 원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반란군이었습니다. 원나라 군대에게 계속 밀리다가 고려까지 쫓겨온 이들은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공격했습니다. 1차 침공 때는 4만 병력을 끌고 왔으나 고려군에 패하고 도망쳤지만, 2차 침공 때는 무려 2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고려사에 등장하는 "20만"이라는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과장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당시 동북아의 병참 능력을 고려하면 실제 전투 병력은 훨씬 적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그럼에도 2차 침입 때 개경이 점령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신하들은 개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과 왕의 안전을 위해 피난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뉘었지만, 결국 공민왕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수도는 빼앗기더라도 다시 되찾을 수 있지만 국왕이 패한다면 돌이킬 수 없다"는 신하의 말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개경을 너무 쉽게 손에 넣은 홍건적이었지만, 곧 최영과 이성계를 비롯한 명장들과 전국에서 모인 20만 장병의 반격에 수도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362년에는 요동 지역을 다스리던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자기 군대를 이끌고 쌍성을 쳐들어왔고, 1364년에는 공민왕과 다투고 원나라로 도망친 대신 최유가 기황후를 부추겨 덕흥군을 고려의 새 왕으로 앉히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기황후는 오빠 기철을 죽인 공민왕에게 잔뜩 화가 나 있던 터라 혜종을 설득해 덕흥군에게 일만 군사를 줘서 고려를 치게 했습니다.

침입 세력 시기 결과
왜구 수십 차례 반복 최영·이성계가 격퇴
홍건적 1차 1359년 (4만) 고려군 승리
홍건적 2차 1361년 (20만 추정) 개경 함락 후 수복
나하추 1362년 이성계가 격퇴
덕흥군·최유 1364년 최영·이성계가 격퇴

나하추와의 전투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나하추는 적장임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의 능력을 높이 사며 칭찬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덕흥군 사건 역시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고려는 원나라 군대를 무찌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처럼 공민왕 시대의 고려는 개혁을 꿈꿨지만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 때문에 전쟁만 하느라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공민왕의 정치적 변곡점

고려 말 왜구 토벌 전투 장면 이미지

공민왕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비극은 바로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이었습니다.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던 시절에 만난 원나라 황실의 여인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끔찍이도 사랑했다고 유명합니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녀가 아닌 다른 왕비는 들이지 않으려 했지만, 결혼 후 10년 동안이나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결국 후계자를 위해 다른 왕비를 들였습니다.

 

그러던 중 1364년 마침내 노국대장공주가 임신을 하자 공민왕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임신한 노국대장공주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자 공민왕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공민왕은 그녀가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 있길 바라며 승려를 불러 기도를 드리게 했고, 모든 죄인을 심지어 사형수까지 풀어주었습니다. 선행을 베풀면 그만큼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민왕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노국대장공주는 1365년 결국 아이를 낳던 중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리도 사랑하던 아내를 잃은 공민왕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슬픔에 빠졌고, 국고를 탈탈 털어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이후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보며 대화를 하는 등 도저히 슬픔에서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 초췌해진 공민왕은 결국 직접 고려를 개혁하겠다는 의지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는 단순히 "개혁 의지 상실"로만 보지 않습니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이후 공민왕은 신돈이라는 스님을 불러들여 고려 개혁을 부탁했는데, 이는 기존 권문세족 체제와 결별하려는 또 다른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와 노비 정리라는 실질적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신돈 정치는 논란이 많지만, 공민왕이 개혁 의지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균형 잡힌 평가가 필요합니다.

 

공민왕의 생애는 원 간섭기라는 국제 정세 속에서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려 했던 개혁 군주의 노력과, 끊임없는 외침 속에서 전쟁만 치러야 했던 비극,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개인적 슬픔이 모두 얽혀 있습니다. 그의 시대는 고려가 멸망으로 향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왕조가 태동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성계라는 인물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도, 신돈의 개혁이 추진된 것도 모두 이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공민왕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한 왕의 생애를 아는 것을 넘어, 고려 말 동북아 국제 질서의 재편과 조선 건국의 배경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반원정책과 쌍성총관부 수복은 고려의 자주성 회복 시도였고,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은 당시 동북아가 얼마나 격동의 시기였는지를 보여줍니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개인적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신돈 정치라는 새로운 개혁 시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정치적 변곡점으로 평가됩니다. 다만 병력 규모나 원 황제 호칭 등 세부 사항에서는 사료 비판이 필요하며, 이러한 역사적 정확성을 유지할 때 비로소 공민왕 시대의 진정한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공민왕이 기철 일당을 숙청한 것은 위험한 결정 아니었나요?

A. 맞습니다. 기철은 원나라 황후 기황후의 오빠였기 때문에 숙청 시 원나라의 보복이 우려되었습니다. 실제로 신하들도 반대했지만, 공민왕은 당시 원나라가 홍건적 등 각지의 반란 진압으로 고려를 칠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국제 정세를 정확히 읽은 전략적 결정이었으며, 실제로 원나라는 즉각적인 보복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후 기황후가 덕흥군 사건을 일으키는 등 지속적으로 공민왕에게 적대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Q. 홍건적 2차 침입 병력이 정말 20만이나 되었나요?

A. 고려사에는 20만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과장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당시 동북아의 병참 능력과 군사 동원 체계를 고려하면 실제 전투 병력은 훨씬 적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대와 중세의 병력 기록은 과장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적군의 숫자는 더욱 부풀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만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므로, 규모가 상당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Q. 노국대장공주 사후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고려 개혁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습니다. 신돈은 승려 출신으로 기존 권문세족과 연결되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공민왕은 그를 통해 기존 체제와 결별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개혁을 시도하려 했습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불법으로 빼앗긴 토지와 노비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는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흔드는 급진적 조치였습니다. 비록 신돈 정치는 논란이 많았지만, 실질적 개혁 시도였다는 점은 인정됩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M1IuOm-I5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