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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북진정책의 실체 (왕건 평양전략, 거란외교갈등, 소손녕침공)

by 여행정보정리 2026. 2. 14.

고려 건국 초기부터 거란의 1차 침공까지, 한반도 북방을 둘러싼 긴장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국가 정체성과 생존 전략이 얽힌 복잡한 역사적 과정이었습니다. 태조 왕건이 내세운 고구려 계승 의식은 단순한 명분이 아니라 실질적인 북방 개척 정책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고려와 거란 사이의 불가피한 충돌을 예고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왕건의 평양 중심 전략부터 성종 대의 외교적 선택, 그리고 소손녕이 이끈 거란군의 침공까지, 10세기 동북아 국제 관계의 역학을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왕건의 평양 전략과 북진 정책의 전개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계승 의식을 확고히 했습니다. 그의 호족 출신 배경에도 불구하고 '고려'라는 국호 자체가 고구려의 약칭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단순한 명칭 차용이 아니라 명확한 정치적 메시지였습니다. 왕건은 발해를 고구려의 또 다른 계승국으로 인정하며 친근하게 지냈고,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 태자와 수만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고구려 유산을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연대를 통해 북방 세력권을 구축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반면 여진과 거란에 대해서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여진에게는 "화친을 맺지 않되, 스스로 굽히고 들어올 경우 받아주라"는 조건부 포용 정책을 펼쳤지만, 거란에 대해서는 완전한 적대 관계를 선언했습니다. 심지어 남쪽에서 신라와 후백제와 대립하는 상황에서도 왕건은 북진 정책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평양 점령이었습니다. 왕건은 "평양은 옛 고구려의 수도로 지금은 황폐하지만 그 터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을 점령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면 훗날 큰 이득이 될 것"이라며 평양을 전략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평양을 점령한 왕건은 대동강과 청천강 사이에 성을 쌓으며 북방을 탄탄히 했습니다. 또한 남쪽 백성들을 북쪽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는 백성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북쪽으로의 이주는 척박한 환경과 외적의 위협에 노출되는 고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세종 때 사군육진 개척 과정에서도 강제 이주민들이 자신의 팔다리를 자르며 저항했던 것처럼, 왕건 시대의 사민 정책 역시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수반했습니다. 그럼에도 왕건은 이 정책을 밀어붙였고, 평양을 서경으로 격상시켜 심지어 수도 이전까지 고려했습니다.

 

왕건의 북진 의지는 외교 영역에서도 드러났습니다. 그는 당시 중원을 차지한 후진의 황제 석경당에게 사신을 보내 "같이 거란을 치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석경당은 거란의 도움으로 황위에 오른 인물로, 거란 황제를 아버지라 부르며 사대하는 처지였기에 이 제안을 무시했습니다. 이러한 외교적 시도는 실패했지만, 왕건이 거란을 얼마나 강력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대상 세력 왕건의 정책 핵심 근거
발해 적극적 우호 관계 고구려 계승 공유, 태자 귀순 수용
여진 조건부 포용 스스로 굽히면 받아들임
거란 완전 적대 선제 공격 계획, 외교적 고립 시도

왕건 사후 2대 혜종은 제위 2년 만에 병사했고, 3대 정종이 즉위했습니다. 정종 역시 태조처럼 북진에 진심이었습니다. 그는 청천강과 대령강 사이에 성을 쌓고 서경 천도를 본격 추진하며 궁궐까지 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과격한 추진으로 백성들의 반발이 극심했고, 정종이 재위 4년 만에 병사하면서 서경 천도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왕건과 정종의 북진 정책은 분명 적극적이었으나, 실제 옛 고구려 전 영토를 회복할 만한 국력은 부족했다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이는 이념과 상징의 표방, 그리고 현실적 방어 전략이 혼재된 정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거란 외교 갈등과 송나라의 개입

정종 이후 광종과 경종을 거치는 약 30~40년간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별다른 충돌이 없었습니다. 거란에서는 세종과 목종이 연이어 암살당하며 내부 혼란이 지속되었고, 외부로 눈 돌릴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 시기 중국에서는 송나라가 등장해 5대10국 시대를 종식하고 중국을 통일했습니다.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했으며, 특히 유학을 숭상한 6대 성종은 송나라를 더욱 가까이했습니다.

 

성종 4년, 송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거란을 함께 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는 송 태종의 2차 거란 침공을 앞두고 나온 제안으로, 송나라는 1차 침공 실패의 교훈을 살려 고려의 군사적 지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송나라의 논리는 명확했습니다. "거란은 고려에게도 위협이 되는 존재다. 국경을 맞대고 있고 군사력도 강한 나라가 적대 관계로 남아 있으면, 거란이 송을 무너뜨린 다음 차례는 고려일 것이다. 거란이 더 커지기 전에 힘을 합쳐 치자"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훗날 몽골의 원나라와 여진의 청나라는 중원을 장악한 후 고려와 조선을 압박했으니, 송나라의 우려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란 기병과 북방 군사력 설명 이미지

하지만 성종은 섣불리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성종은 문한 왕으로 평가받는 인물로, 유학 장려와 지방 제도 정립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광종이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국가의 토대를 마련했다 하나, 아직 국가 체제가 완전히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적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지방 행정 제도를 개편하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규모 대외 전쟁을 감행하는 것은 국가 역량을 고려할 때 무리한 선택이었습니다.

 

결국 성종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회피하고 시간을 끌었습니다. 송나라 사신은 협박과 회유를 반복하며 답변을 촉구했지만, 성종은 말로만 동의하고 실제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송 태종은 2차 거란 침공을 감행했으나 처참하게 패배했습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끼어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던 셈입니다. 이는 성종의 우유부담함이 아니라, 내정 안정을 우선시한 현실적 판단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대외 팽창보다 국가 기반 정비가 급선무였던 시기적 상황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송나라의 패배 다음 해, 이번에는 거란이 고려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습니다. 당시 거란은 태후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태후는 본격적으로 송나라에 반격을 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고려가 송을 도와 뒤에서 공격할 가능성을 우려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화친을 제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고려 조정의 입장은 명확했습니다. "우리는 거란과 화친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었죠.

 

거란 입장에서는 고려가 계속 적대 관계로 나오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태후는 동쪽 세력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거란의 동쪽에는 아직 발해 부흥 세력이 활동하고 있었고, 여진족도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고려도 있었습니다. 태후는 야율사진과 소영에게 명하여 먼저 발해 부흥 세력을 끝장냈고, 여진족도 어느 정도 정리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고려뿐이었습니다.

소손녕 침공과 80만 대군의 진실

태후의 명을 받은 거란 장수 소손녕이 무려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왔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거란의 1차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80만이라는 숫자는 믿을 수 있을까요?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 숫자에 대해 상당한 회의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0세기 동북아의 군사 동원 능력과 보급 체계를 고려할 때, 80만 명의 실제 동원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수 연구자들의 견해입니다.

 

당시 거란의 전체 인구와 생산력, 그리고 장거리 원정에 필요한 병참 지원 시스템을 감안하면, 실제 전투 병력은 수만에서 십여만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80만이라는 숫자는 적의 위세를 과장하여 기록함으로써 전쟁의 규모를 부풀리거나, 혹은 이를 막아낸 고려의 방어 성과를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수사적 표현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과 한국의 고대 전쟁 기록에서는 병력 숫자를 과장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며, 이는 역사서의 서술 관행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배경에는 여러 전략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첫째, 송나라와의 본격적인 대결을 앞두고 동쪽 후방을 안정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고려가 송나라와 연대하여 거란을 협공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둘째, 발해 유민과 여진족을 복속시킨 후 고려까지 굴복시킴으로써 동북아 전체의 패권을 확보하려는 야심이 있었습니다. 셋째, 고려가 계속 거란의 화친 제의를 거부하고 적대적 태도를 유지하자, 군사적 압박을 통해 고려의 외교 노선을 바꾸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정종 시기 거란이 침공할 거라는 첩보가 들어왔을 때, 고려는 전국에서 30만 대군을 징발해 대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라 태종이 후진 정벌 후 돌아오는 길에 병사하면서 침공이 무산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이번에는 실제로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것입니다. 고려는 다시 한 번 거란의 침공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시기 거란의 동향 고려의 대응
정종 시기 침공 준비 (최광윤의 첩보) 30만 대군 징발, 요 태종 병사로 무산
성종 초기 송나라 2차 침공 전 화친 제안 화친 거부, 송나라 군사 지원 요청도 회피
성종 중기 소손녕의 1차 침공 감행 전면 방어 체제 구축

거란의 1차 침공은 고려가 건국 이래 직면한 최대의 군사적 위기였습니다. 왕건 이래 지속되어 온 북진 정책과 고구려 계승 의식은 고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였지만, 동시에 강대국 거란과의 불가피한 충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성종의 현실주의적 외교 선택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일어났고, 고려는 이제 서희의 외교 담판과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이어지는 대거란 항쟁의 서막을 열게 됩니다.

고려 거란 전쟁 초기 전투 장면 재현 이미지

고려 초 북진 정책은 이념적 정당성과 현실적 한계가 공존하는 복잡한 역사적 과정이었습니다. 왕건의 평양 전략은 고구려 계승 의식의 구체화였지만, 실제 영토 회복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성종의 외교적 신중함은 우유부담함이 아니라 국가 역량을 냉정하게 평가한 전략적 판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손녕의 침공으로 촉발된 거란과의 전쟁은, 고려가 북방 정책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아야 하는지를 시험하는 역사적 시련이었습니다. 사용자의 비평처럼, 병력 규모의 과장, 외교 선택의 배경, 북진의 실질적 한계를 함께 짚어볼 때 이 시기 역사의 맥락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왕건이 평양을 서경으로 격상시키고 천도까지 시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왕건은 평양을 옛 고구려의 수도로서 상징성이 크고 전략적 가치가 높은 거점으로 인식했습니다. 평양을 서경으로 격상시킨 것은 단순한 행정 구역 조정이 아니라, 고구려 계승 의식을 구체화하고 북방 개척의 전진 기지로 삼으려는 의도였습니다. 천도 시도는 결국 실패했지만, 이는 왕건이 얼마나 북진 정책에 진심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Q. 성종이 송나라의 군사 지원 요청을 거부한 것은 잘한 선택인가요?

A. 역사적 결과로 볼 때 성종의 선택은 현명했습니다. 송나라는 2차 거란 침공에서 참패했고, 만약 고려가 참전했다면 거란의 보복 침공이 더 일찍, 그리고 더 강력하게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고려는 국가 체제 정비가 우선 과제였고,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바탕으로 내정 개혁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무리한 대외 전쟁보다 국력 배양이 더 시급했던 상황에서 신중한 외교는 합리적 판단이었습니다.

 

Q. 거란의 80만 대군이 과장이라면 실제 병력은 얼마나 되었나요?

A. 정확한 수치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실제 전투 병력이 수만에서 십여만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10세기 동북아의 인구 규모, 생산력, 병참 체계를 고려하면 80만 명을 장기간 유지하며 원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고대 전쟁 기록에서 병력 숫자는 자주 과장되었으며, 이는 적의 위세를 강조하거나 승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었습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i7JFeLh8cL0